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카테고리 없음 2011. 8. 29. 15:47

▲ 가정순회교육하러 가기 전, 아침 일찍 수내동의 스타벅스에 앉아서 독서를 하면 그렇게 뿌듯하죠. 얼리버드 선생님은 조용한 스타벅스와 자아도취에 취해버린다죠.

 
   하나님을 믿게된 곳이 교회여서 주일의 예배시간을 좋아했던 고등학생 소녀가 '공동체'에 깊은 관심을 갖게된 지 이제 4년을 달려간다. 난 어느새 마성의 여자가 되어버렸...푸하하하하하하!
 
  그냥 나는 매주 주일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여러 모임들에 참여했기 때문에 잘 몰랐었지만 멀리서 교회를 바라보려고 하면 정말 많고 다양한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마치 프리즘에 햇빛을 통과하게 하여 흰종이에 그 예쁜 색색의 스펙트럼 색빛들이 맺히는 것처럼 교회의 모습이 그런거 같다.
  이 스펙트럼처럼 사람보기에 마냥 이쁘기만 할까, 당연히 아니올시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마냥 현실은 시궁창일까, 당연히 아니오실시다 라고 말하련다. 교회는 교회라고 말하고 싶다. 
  개개인의 다양성 때문에 아름답기도 하면서 진짜 내 속을 시궁창으로 만드는 어쩌면, 내 속이 시궁창이라고 말해주는 그 교회가 징글맞을 때가 있다. 
  이 징그럽고 관계의 연결망에서 나의 선함과 악함 그리고 교만함을 보면 끝도 없어서 "역시. 혼자가 역시 편해. 피곤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지 않아"라고 끝맺곤 하지만..


  결국은 
  '공동체 관계의 연결망에서 즐겁고 아름다운 것도 치명적인 고통스러움까지도 모두 옳다.'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은 관계다.'라고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자매가 보낸 문자 중에 무릎을 탁!쳤던 내용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서로의 삶에 깊숙히 들어가고 싶이 사랑해서 그렇다는 거 알았어요.
   그래서 더 안타깝고 밉고 화나고 했었나봐요. (중략) 이제 조금 우리가 만난 이유 알 것 같아요^^'

  
  그렇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의 관계 안에 거하려고 하면 자신의 잣대로 그 사람을 보게되고
  또는 있는 그대로 용납하려고 하다보면 미칠뻔한 경험을 하게 되는거지..
  인내의 한계에 부딪히고 터뜨려버릴 땐 터뜨리게 되니까..
  무관심하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지도 않는다. 인내의 시작이란 것도 없으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면 내 안의 내가 피투성이가 되고 내 안의 그가 피투성이 된다.
  피투성이 되는 것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어야 한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팠던 것이 치유되고, 적극적인 자유의지를 갖고 나와 그를 사랑하여 그 상처들을
  사랑으로 닦아줄 수 있다면 나는 교회가 나의 고민이고 나의 사랑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나의 고민이고 나의 사랑인 건 절대로 불필요한 일이 아니다.




  관계들 속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했는데 
  만남과 이별의 Circle에서 나는 지금 이별로 향하는 그 어디쯤에 서있다.

  사랑하면 떠나지 않고 책임을 지는게 맞을 때도 있지만 
  때론 사랑하면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보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기꺼이 보내주는 마음에서 비롯된 눈물이 사랑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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